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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의 한 - 계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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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5-08-02 17:07 조회27,2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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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계 백 (階 伯) <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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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0(의자왕 20) <br>
■ 백제 말기의 장군</b> <br><br>
▶ 황산벌의 한 <br>
계백(伯)이라고도 표기한다. 관등은 달솔(達率)이다. 660년 김유신(金庾信)과 소정방(蘇定方)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지금의 大田 동쪽 馬道嶺)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천인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黃山:지금의 連山)벌에 나가 5만여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br>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한 나라의 힘으로 나·당의 큰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고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였다.<br>
또한, 병사들에게도 “옛날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5천명으로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70만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마땅히 각자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격려하였다.<br>
그의 결사대는 험한 곳을 먼저 차지하여 세 진영으로 나뉘어 신라군에 대항하였다. 목숨을 버릴 것을 맹세한 5,000 결사대의 용맹은 신라의 대군을 압도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신라군과의 네번에 걸친 싸움에서 모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br>
그러나 반굴(盤屈)·관창(官昌) 등 어린 화랑의 전사(戰死)로 사기가 오른 신라의 대군과 대적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나 적었다.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계백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br><br>
▶ 나라와 더불어 죽은 자 <br>
계백의 이러한 생애는 후대인들의 높은 칭송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는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br>
한편, 권근(權近)은 계백이 출전하기에 앞서 처자를 모두 죽인 것이 오히려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결국 패하는 결과를 낳게 한 것이며, 계백의 그러한 행동은 난폭하고 잔인무도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그것은 특이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br>
그러나 서거정(徐居正) 등은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여 “당시 백제가 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기에 자신의 처자가 욕을 당하지 않도록 몸소 죽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은 그 뜻과 절개를 높이 사야 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백제가 망할 때 홀로 절개를 지킨 계백이야말로 옛 사람이 이른바 “나라와 더불어 죽는 자”라고 칭송하였다. <br>
그 평가는 이후 조선시대 유학자들간에 그대로 계승되어 계백은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그뒤 계백은 부여의 의열사(義烈祠)와 연산의 충곡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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