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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리학의 순교자 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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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5-08-02 15:51 조회26,5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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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 배속된 관료들을 특별히 언관(言官)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의 활동을 크게 권장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임금에게 ‘바른 소리’, 즉 간(諫)을 하는 역할과, 관리의 비행을 조사하여 그 책임을 규탄하는 일을 맡은 기관이었다. 물론 요즘처럼 언론기관이 존재하진 않았지만, 국가 체제 유지에 필요한 긴장감이 유지되도록 자체적으로 비판하고 감시하는 기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언관들은 왕과 고위 관료들이 유교적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감시하고 이끄는 파수꾼이라는 의식과, 사대부 계층의 공론(公論)을 대변한다는 사명감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이 가운데 조광조(1482∼1519·성종 13년∼중종 14년)는 언관으로서 부여된 소명에 최선을 다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유교 국가임을 내세운 조선왕조가 유교적 가르침 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광조는 평생 이러한 원칙을 지키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말에는 힘이 담겨져 있었으며, 중종을 비롯한 당시의 지배자들은 속으로는 그를 싫어했을지 몰라도 그의 올바른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왕조의 도덕적 교사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그럴수록 인심이 그에게 쏠렸다.

그는 관직에 나아간 지 40개월이 채 안된 1518년(중종 13년) 11월 언관의 수장인 사헌부의 대사헌에 임명됐다.

당시는 연산군을 퇴위시킨 중종반정 직후였다. 그러나 정국은 매우 불안했다. 연산군을 퇴위시키긴 했지만, 연산군의 폭정에 대한 책임논쟁이 잠복되어 있었던 것이다. 연산군을 몰아낸 그 주역들은 중종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자신들을 정국공신에 책봉하면서 많은 부와 특권을 차지했다. 공포를 자아낼 정도로 전제적 왕권을 휘둘렀던 연산군을 몰아 낸 이들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진정한 충신은 ‘목숨을 빼앗기더라도 왕에게 해서는 안될 일을 지적하고 언행을 바로 잡도록 간언(諫言)하는 것’이었다. 공신들은 바로 연산군 대에 고위 관직에 있던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그런 간언을 올린 사람들이 아니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연산군 퇴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로 인정했으나, 연산군 대에 군주를 잘못 섬긴 사람들이 자신들의 왕을 내쫓고 모든 특권을 당연한 듯 누리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조광조는 대사헌이 되면 이러한 여망에 따라 그릇된 관료들에 대한 과감한 탄핵활동에 나서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조광조도 그런 책임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거듭 대사헌의 자리를 사양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쏠린 주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그는 대사헌이 되자 먼저 과거제도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재가 필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천거(薦擧)제(과거를 통하지 않고 추천을 통해 관리를 뽑는 제도)를 실시하자고 건의했다.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대사헌이 된지 약 6개월 후인 1519년 4월 조선왕조에서 첫 천거제가 실시되어 28명의 급제자를 배출했다.

그가 인재 등용제도 개혁에 앞장 선 것은 정국공신들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의도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는 정국공신들이 이끌어 가는 파행적인 정치구조로는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가 없다고 믿었다. 천거제 실시는 그 첫단계였으며, 그의 정적들도 그 점을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정국공신들은 조광조가 천거제로 새로운 인재를 뽑은 다음 정국공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차지하려 한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이같은 내용의 편지를 화살에 매어 궁궐에 쏘는 일도 공공연히 벌어졌다. 이것은 분명한 위협이었지만 조광조는 물러서지 않았다.

1519년 10월 조광조는 드디어 정국공신들을 정면으로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는 상소문에서 “정국공신 중에는 연산군의 신임을 받았던 사람들이 많은데 연산군이 선정(善政)을 이룰 수 있도록 간언하지 못했다면 그것만으로 큰 죄를 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연산군의 폭정이 너무 지나쳐서 공신들로서는 퇴위시킬 수밖에 없었다면 후에라도 부끄러워하고 물러나는 겸양의 태도를 보여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섬기던 군주를 죽음으로 내몬 것을 공로라 생각하고, 어떻게 공신의 지위를 향유할 수 있는가 하고 공신들을 공격했다. 이러한 비판은 너무도 정곡을 찌른 것이기에 정국공신들은 조광조를 반박할 논리를 찾을 도리가 없었으며, 압력을 가한들 물러날 조광조도 아니었다. 그래서 공신들은 중종에게 조광조를 제거하라고 위협을 가했다.

중종은 결국 정국공신들의 압력에 굴복했다. 이렇게 해서 1519년 (중종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았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목표가 순조롭게 달성되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언관의 수장이 되기로 한 이상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죽음으로 그의 소망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 같았지만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 대부분은 10여년이 지나면서 서로 분열하고 죽이는 분쟁에 휩싸였다. 기묘사화 이후 20여년 이상 왕위에 있었던 중종은 신뢰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신하도 곁에 둘 수 없었으며 왕으로서 권위도 상실하고 말았다.
반면에 조광조는 조선왕조의 도덕적 파수꾼으로 역사에 길이 남는 존재가 되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7-2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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